Expert
정지우
문화평론가 · 변호사 · 작가
문화평론가 겸 변호사입니다. <AI, 글쓰기, 저작권>, <글쓰기로 독립하는 법> 등 다양한 책을 집필하며 기술과 인간, 법의 경계에서 날카로운 통찰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AI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안목’의 힘
사실상 모든 사람들이 AI를 활용하는 시대가 되면서, ‘평균’이 부쩍 높아졌다는 이야기가 많다. 기획서, 보고서, 보도자료 등 각종 업무 텍스트들의 평균이 올라간 것은 물론, 칼럼, 에세이, 논문 당 다양한 분야의 글쓰기가 무척 효율적이 되었다. SNS에만 하더라도, 과거에는 ‘긴 글’이 비교적 드물고 카드뉴스나 짧은 글이 많았다면, 최근에는 누구나 긴 글 한 편 올리는 걸 어렵지 않게 생각한다. 그러나 의외로 AI를 활용한 글쓰기로 새롭게 등장하여 큰 혜택을 누린다는 사람을 찾아보긴 어렵다.
글쓰는 사람들을 놓고 보자면, 여전히 기성 작가들의 활약이 이어지고 있고, 기획 등에서도 기존 인력의 비슷한 업무 수준이 유지되고 있다.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기존에 기획을 하고 글을 쓰던 사람들의 ‘안목’은 계속 유지되기 때문이다. 기획을 바라보는 안목, 좋은 글을 써내고 알아보는 안목이 있는 사람이 AI를 활용하더라도 더 잘 활용한다. 기술의 문턱이 낮아져 누구나 그럴싸한 결과물을 낼 수 있게 된 세상일수록, 진짜 차별화는 '생성' 그 자체보다 '선택'의 영역에서 발생하게 된다.
AI는 확률적으로 가장 적절해 보이는 문구들을 이어 붙이고, 데이터의 파편들을 나름대로 조합해내지만, 결국 그렇게 생성된 결과물이 사업 현장과 시장에서 얼마나 정확하고 적절한지는 최종적으로 인간이 결정하게 된다. 당장 AI에게 동일한 프롬프트를 주고 기획서안을 100개 만들어내라고 하면 AI는 100개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각각의 안을 선택해야 할 이유를 100장씩 써내라고 하면 100장씩 써낸다. 그 중에서 어떤 안의 어떤 근거가 가장 적절한지 선택하는 건 결국 인간의 ‘판단하는 힘’에 달려 있다.
나아가 선택한 안을 바탕으로 아이디어의 세부사항을 수정하고, 호소력 있는 문장들을 걸러내며, AI의 어색한 어휘들 속에서 자연스러운 감각으로 최종 편집하는 역할도 인간에게 주어진다. 심지어 저작권 측면에서 보더라도, AI가 단순 생성한 안에는 저작권 자체가 발생하지 않기에, 그러한 인간의 ‘창작적 개입’이야말로 법적으로도 그 기획의 진짜 주인이 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안목을 지닌 기획자가 AI가 제시하는 안들 가운데 스스로 가장 좋은 안을 채택하고, 자기만의 안목과 언어로 재구성하는 행위는, 단순히 효율을 챙기는 것을 넘어 그 결과물의 진정한 주인으로서 역량을 증명하고, 가치와 권리를 확보하는 유일한 길인 셈이다. 모두가 같은 도구를 쥔 시대일수록, 그 도구를 활용하는 기획자의 ‘한 끗’이 기획의 가치를 결정한다.
현장을 움직이는 '맥락'의 힘
나아가 기획의 성패는 그 기획이 놓이는 ‘맥락’을 얼마나 정교하게 읽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기획의 실질은 논리적으로 그럴싸한 문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까다로운 거래처의 동의를 얻어내거나 변덕스러운 대중의 실질적인 호응을 이끌어내는 현장에 있다. AI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데이터를 학습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무난하게 어울릴 법한 ‘평균적인 수작’을 내놓지만, 실제 비즈니스 현장은 이러한 통계적 평균치와는 거리가 멀다. 거래처마다 기업 문화와 의사결정권자의 성향이 제각기 상이하고, 기획자가 오랜 시간 그들과 쌓아온 고유한 신뢰 관계와 내부 사정은 데이터의 조합만으로는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영역이다.
대중과 시장을 읽어내는 일에도 기획자의 경험과 감각이 필수적이다. 당장 AI에게 ‘혁신적인 아이디어 제품 홍보안’을 요청하면, AI는 동시대의 일반적인 성공 공식을 나열할 것이다. 하지만 그 기획이 지금 이 시대의 어느 연령층과 성별을 향해, 어떤 포인트로 ‘엣지’ 있게 파고들어야 하는지 각도를 좁히는 작업을 기획자가 해야 한다. 지금 여기, 오늘의 시장에서 대중의 마음이 움직이는 미세한 기류를 파악하고, 실제로 대중에게 호소력 있는 카피, 제품, 서비스를 최종적으로 승인하는 과정에서 사실상 기획자의 진짜 역량이 증명된다.
이처럼 기획자가 지닌 맥락 파악 능력은 AI가 제공한 데이터의 조합을 비로소 현실적인 결과물로 탈바꿈시키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실제 힘이 된다. AI가 제안한 수많은 논리 중에서 지금 이 순간 가장 적중할 맥락을 채택하고, 상대가 반응할 수밖에 없는 언어로 세밀하게 각색하는 행위가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결국 모두가 비슷한 AI 결과물을 들고 경쟁하는 시장에서 진정한 경쟁력은, 구체적인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기획자의 ‘한 끗’에서 완성된다. 이는 기획자의 경험과 능력이 여전히 중요한 이유이자, 기획자 스스로 역량을 길러야 할 이유가 될 것이다. AI에게만 모든 걸 의존하는 기획자가 아닌, 자기만의 감각과 관점, 안목과 경험을 갖춘 기획자가 점점 더 소중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획자의 프롬프트
자기만의 역량을 갖추고 AI를 활용할 때, 사후적인 수정 보완도 중요하지만, 시작 단계부터 가능한 한 정교하게 프로픔트의 ‘제한 조건’을 설계하는 것도 중요하다. 프롬프트가 추상적이고 모호할수록 AI는 누구에게나 통용될 법한 뻔하고 평범한 결과물을 내놓기 때문이다. 기획자가 글을 쓰는 목적과 타깃 독자, 원하는 효과를 세부적으로 정해놓고 AI의 범위를 일일이 제한할 때 AI는 진짜 나의 손발처럼 움직이기 시작한다. 프롬프트 자체에 다양한 생각들을 풀어놓으면서 AI가 구체적인 개요나 기획을 짜는 사전 방향을 설정해주고, 경우에 따라서는 초안 정도는 직접 써서 입력시킨 후 다듬거나 확장시키게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실무적으로는 이를 ‘한정수식어구’의 설계라고 부를 수 있다. 단순히 "화장품 홍보 글을 써달라"고 명령하기보다는, "2030 여성을 대상으로 유기농 성분의 아이라이너를 홍보하되, 직장 생활 에피소드를 담아 인스타그램 카드뉴스 형식으로 제작하라"는 식의 구체적인 제약을 두는 식이다. 보도자료를 작성할 때도 출시 연도와 강조할 소재, 타깃층의 특성, 그리고 구체적인 단락 구성과 문체 스타일을 미리 정해주는 설계가 수반되어야 의도에 부합하는 결과물을 얻게 된다. 이러한 제한 조건들이 촘촘하게 설계될수록 AI는 비로소 기획자의 의도를 충실히 반영하는 도구로 기능하게 된다.
자료 리서치와 팩트 체크의 영역에서도 설계자의 역할은 더욱 부각된다. AI의 검색 기능에만 모든 것을 맡기기보다, 최신 법령이나 국가 기관의 보도자료 같은 공신력 있는 자료를 직접 업로드하여 정보의 입력값을 선제적으로 통제해야 한다. "첨부한 자료 안에서만 검색하여 발췌하라"거나 "추정하지 말고 확실한 정보만 출처를 명시하며 서술하라"는 식의 범위 고정은 AI의 환각 현상을 억제하고 보고서의 신뢰도를 높이는 결정적인 장치가 된다. 팩트 위주의 생성이 필요할 때는 활용 자료의 범위를 한정하고, 인용 문장마다 근거를 표기하도록 지시함으로써 법적 리스크를 관리할 수 있다.
AI 시대에도 무엇이 가장 중요한 메시지인지 선별하고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는 안목은 인간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결국 효율성의 시대에 기획자가 지향해야 할 지점은 도구에게 모든 걸 맡기는 의존적인 태도라기 보다는, AI가 제공한 모든 문장을 나의 관점으로 이해하며 설계해나가는 주도적인 태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입 벌리고 AI가 해준 것만을 감탄하며 바라보는 순간, 이미 나의 안목은 없는 상태나 다름없다. AI 시대의 기획자는 나의 판단능력으로 인간사의 수많음 맥락들을 판단하고, 방향을 설정하며, 구체적인 프롬프트 설계로 AI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내 손발이 될 수 있는 힘을 길러나가야 할 것이다.
Writer. 정지우 변호사